연합군 전승국들의 전후처리 추가조치 이행을 재확인 촉구한다.

장성이북비아방(長城以北非我邦)과 패전국 일본의 1952년 “연합국 ‘전승국(戰勝國)’들의 전후처리(前後處理) ”추가 조치(追加 措置)이행을 재확인 촉구하고 패전국 일본제국주의의 침략과 속심이 드러나는 마각을 살피고 그의 논리의 허구성을 반박 우리의 입장에서 역사적 국제법적 논리를 개발 대응할 일이다 또한 주은래와 장개석의 동북삼성(東北三省)에 대한 역사관을 추종상정(追從想定)할 필요가 있다.

 

소설 단(丹)의 주인공 우학도인(羽鶴道人) 봉우 선사(鳳宇 仙師)께 들은 바에 의하면, 중화민국이 일제의 침략을 받아 극동의 판도가 어지러워 예측 불가능 할 때 장개석 총통은 김구 주석에게 “장성이북비아방(長城以北非我邦)이라”(일본의 패전 이후 양국 간의 전후처리 영토 분활 밀담)고 말했다는 설이 있다. 사실여부를 떠나 이는 “만주(滿州) (동북 삼동성)일대가 중화족의 터나 나라가 아닌 북방족(백두산족. 대동이권)의 영토란”뜻(포기하겠다는 뜻)이다.

 

동북삼성(東北三省)은 1920년대 만주길림성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항일무장단체 최진동(崔振東) 오광선(吳光)鮮 등이 중심이 되어 누비면서 항일투쟁을 전개 봉오동 일대에서 일본군 1개 대대를 섬멸하고 백야 김좌진(白冶 金佐鎭)의 북로군정서(北路郡政署) 관할군대로 편입된 후 청산리전투로 일군의 간담을 서늘케 하던 항일 무장단체들의 독립운동을 하던 일대였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 관동군은 다음해 三月 청조(淸朝) 최후의 황제인 선통제 부의(宣統帝 賻儀)를 북경에서 데려다 집정케 하여 “장성이북”의 만주 땅의 괴래 국을 건국 중화민국(중국)정부의 통치권이 미치지 못했던 지역이다. 더구나 “1909년 일제와 청나라가 간도밀약을 맺기 이전”에는 청나라의 영토가 아니었다.

 

참고: 주은래는 “고조선-고구려-발해사는 한국사”다. 중국 국수주의자들의 움직임 질타. <중국 정부의 아킬레스건 ‘주은래의 1963년 발언록’>

 

한심한 것은 중국의 1차 공정 때 주은래 발언록으로 중국 정부를 꿀 먹은 벙어리로 만들었던 주요 문건의 존재를 우리정부가 알만 헌데 까먹고 있다는 사실이다. 13억 중국인들이 모택동보다도 더 존경하는 주은래가 생전에 중국 국수주의 사학자들의 고조선-고구려-발해사 왜곡을 통렬히 비판했던 귀중한 발언록이 그것이다.

 

 

중국의 한국사 왜곡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중공의 최고지도자 주은래외상도 고구려와 발해 땅이었던 동북지역은 한족(漢族)의 땅이 아니라는 ‘간접적인 발언’을 1963.6.28일 북한 조선과학원대표단 20여명과 만난자리에서 주은래총리가 ‘중국. 조선 관계를 논의하는 공석자리’에서 발표했다고 하는 동북지역이다.

 

우선 그는 한-중 고대-중세사와 관련, “역사연대에 대한 두 나라 역사학의 일부 기록은 진실에 그다지 부합되지 않는다.”며“이는 중국 역사학자나 많은 사람들이 대국주의, 대국 쇼비니즘(국수주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한 것이 주요 원인이며, 그리하여 많은 문제들이 불공정하게 쓰였다”며 역사 왜곡의 근본책임이 중국에 있음을 시인했다.

 

그는 구체적 실례로 “요하(遼河), 송화강 유역에는 모두 조선족의 발자취가 남아있다. 이것이 요하와 송화강 유역에서 발굴된 문물, 등에서 증명되고 있으며 수많은 조선 문헌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분명한 것은 조선족 일부가 원래부터 한반도에서 거주하였다는 것이다. 도문강, 요하, 송하강 유역에서 거주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역사기록과 출토된 문물이 이미 증명하고 있다”고 재차 강조 했다.

그는 우선 고구려사와 관련해서, “진 한나라 이후 빈번하게 랴오허 유역을 정벌했는데 이것은 분명 실패한 침략”이라며 “당나라도 전쟁을 치렀고 또 실패했으나 당신들을 무시하고 모욕했다. 그때 여러분의 훌륭한 장군이 우리 침략군을 무찔렀다”며 고구려사를 한국사로 인정했다.

그는 발해사와 “징보(鏡泊)호 부근은 발해의 유적이 남아있고 또한 발해의 수도였다” 며 “여기서 출토된 문물이 증명하는 것은 거기도 역시 조선족의 한 지파(支派)였다는 사실”이라며 발해사를 한국고대사의 한 지파로 인정했다.

청나라 시절 만주영토 침탈에 공식 사과도

 

저우라이는 만주족이 지배한 청나라시절 한국의 조상들이 지배했던 영토가 청나라의 영토로 팽창주의로 크게 줄어든 데 대해 공식사과하기까지 했다.

그는 “만주족은 중국에 대해 공허한 바가 있는데 바로 중국 땅을 크게 넓힌 것이다. 왕성한 시기에는 지금의 중국 땅보다 더 컸었다.

 

그는 이어 “다만 이런 것들은 모두 역사의 흔적이고 지나간 일들이다. 어떤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책임질 일이 아니고 조상들의 몫이다. 그렇지만 당연히 이런 현상은 인정해야만 한다.” 며 “이렇게 된 이상 우리는 당신들의 땅을 밀어 붙여 작게 만들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당이 커진 것에 대해 조상을 대신해서 당신들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공식적으로 중국의 영토 침략을 사과했다.

저우라이 총리는 사과후 “그래서 반드시 역사의 진실성”을 회복해야 한다. 역사를 왜곡할 수는 없다. 도문강, 압록강 서쪽은 역사 이래 중국 땅 이었다 거나, 심지어 고대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황당한 이야기다”라고 재차 중국학자들의 쇼비니즘을 재차 비판했다. 

 

* 참고 : 더구나 1905년 대한제국의 나라를 파라먹은 왜놈의 앞 자비인 친일 반민족 역신들 매국노들(8명)이 황제의 뜻을 어기고 일본과의 불법 협약 한 “을사조약”이란 ‘늑약‘,을 대한제국 황제는 끝 까니 거절 인준하지 아니하였다. 이러한 불법조약에 의거(依據)해 1909년 북 가도를 청나라에 넘겨주고 일본은 만주의 철도부설권과 탄광개발권 등 각종이권을 얻어 대륙침략의 교두보를 설치하였다.

 

또한 국제법상 “을사조약(乙巳條約)”이 불법 조약으로 판명 된지 오래되었다. 북 간도인 현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즉 ’동북3성은’ 청나라 태종이 ‘수도를 심양에서 북경으로 옮긴’ 후 1712년 5월15일부터 “공백상태로 우리의 영토”였다.

패전국 일본은 1952년 “연합국 전승국(戰勝國)들의 전후처리(前後處理) ”추가 조치(追加 措置)에 의해“ ”중화인민공화국(옛 청나라, 때의 협약)과 일본 양국이 1941년 12월9일 이전에 체결한 모든 조약, 협약 및 협정“은 무효임을 ”세계만방에 공포“하였다.

 

따라서 1952년연합국 전승국들의 전후처리 추가 조치에” 의해 1905년 “을사늑약”의 불법 협약에 근거한 “간도협약(間島協約) (1909년)은 원천적으로 무효이며, 현재 중국이 불법적으로 점유(占有)하고 있는 영토는 언제인가는 장개석총통과 주은래 말 맛 다나 "장성이북비아방, (長城以北非我邦)“이라 장차 우리 통일정부가 수립되면 우호적인 관계와 동북아에 안정과 평화를 위해 처리되기를 바란다.

 

한족(漢族)은 만주 일대의 역사와 문화유산 등 미련을 포기하도록 사학자들은 좀 더 시야를 넓혀 고조선의 맥락과 그 이전의 상고사의 원뿌리를 찾아 복원, 역사의 정사(正史)를 찾아가는 백두산족문화권의 공영과 새로운 인류애와 홍익인간이념을 구현 실천하는 민족사관이 필요할 때이다.

 

독도문제 전후처리로 해결

1904년 러, 일 전쟁과 일군의 상륙, 1905년 을사조약에 의한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 독도의 일본영토 편입 ‘시마내현으로 고시’ 한 대서 시작된 것으로, 이는 러일전쟁으로 찬탈해간 침략 제국주의의 산물이다.

역사적으로 침략과 약탈 싸움을 좋아하고 과거 전시 중 전쟁놀이로 자라난 아베 총리 일급 전범자 외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그는 일본을 불행한 길로 끌고 가려한다.

 

패전국인 일본은 역사적인 근거와 전승국들의 전후처리 추가조치의 의거해 전범국이며 패전국임을 스스로 깨닫게 하고, 일본의 논리의 허구성을 반박 우리의 입장에서 역사적 국제법적 논리를 개발 대응할 일이다.

“1941년 12월9일 이전에 체결한 모든 조약, 협약 및 협정은 무효임을 세계만방에 공포”하였다.

2014, 01, 25

플러스코리아타임즈 상임고문

한 얼 역사정신선양연합 일손 박종호 총재